호남 황해인들이 개국한 코리아 (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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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 황해인들이 개국한 코리아 (3회)
  • 광주타임즈
  • 승인 2018.02.21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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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광주타임즈]한국사이버문학인협회 이사·시인 문경주=‘부패하고 무식하며 비겁한 사람들은 독재자들에게 투표했을 것이고 정의롭고 똑똑하며 용감한 사람들은 민주 투사들에게 투표했을 것이다.’

청해진(淸海鎭)이란? 바다를 사심 없이 맑고 깨끗하게 관리한다는 뜻으로서 장보고가 꿈꾼 세상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간단명료(簡單明瞭)하게 요약한 것으로서 그분이 해맑은 통치자적 사상이라고 여겨진다.

장보고의 사망 년대는 일본 측 기록엔 서기 841년경으로 나오는데 우리나라의 기록은 서기843~846년경으로 되어 있어 어느 기록이 정확한지는 알 수가 없다.
장보고는 옛 부하였던 염장에 의해 암살당했고 그가 사망 할 당시의 청해진 수군 병사들은 무려 10만여명이 넘은 것은 확실하다. 그 정황으로서 장보고의 사망을 원통해하며 신라의 명령을 잘 따르지 않았던 장보고의 심복들을 박해 또는 학살할 목적으로 오늘날의 전북 김제군에 해당하는 벽골제(호남의 기준)저수지 준설 공사라는 명목으로 그들 중 10만명을 강제 이주시켰던 것이다. 염장의 회유를 거부한 병사들 10만여명을 벽골제로 이주 시켰다면 인간의 특성상 그래도 염장에게 아첨하거나 지지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할 때 당시의 장보고 군단은 십 수만여명이었을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이는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키고 군부 독재를 반대하는 애국 청년들까지 깡패, 창녀들과 함께 섞어서 ‘국토건설 단’이란 이름으로 각, 지방의 불모지로 이주시킨 경우와 또는 전두환이 1212쿠데타로 집권하면서 반대 세력들을 잡아다가 ‘삼청 교육대’에 수용하고 두드려 패거나, 고문을 가하여 죽이기도 하고 병신을 만든 것과 같은 방법이었으며 전두환은 박정희를 따라서 했지만 박정희는 장면 정권이 깡패소탕 계획을 세워놓은 것을 가로채어 깡패들과 함께 반 군부독재 세력들을 포함시킨 차이가 있고 결국은 신라말기의 염장이 써먹었던 온당치 못한 권력형 테러의 계승된 악습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방법은 신라에서만 시행된 것은 아니며 고대의 전쟁을 통해 상대국가 또는 집단을 제압하고 사상적으로 회유가 불가능해 보이는 지배계층에 가까운 사람들일수록 학살하거나, 노예로 만들었으며 훗날 영국도 범죄자와 종교 갈등의 청교도 운동가들을 정치범 또는 흉악범들과 섞어 오늘날의 호주(오스트레일리아)에 강제 이주시킨 것처럼 인류의 번식과 더불어 고대로부터 되풀이되어 온, 반민족적이고 야만적인 역사의 못된 악습이었다고 할 수 있으며 지금도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에서 신음하고 있는 우리 겨레의 한 민족이 처참하게 고통 받으며 학살되어지고 있는 현재의 진행형이기도하다.

전북 김제군 벽골지의 관광구역 건너편에 장보고 부하들을 벽골제로 강제 이주시킨 기념비가 있는데 ‘타이틀’은 청해진 유민으로 표기되어있어 언어 순화를 꾀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그곳 사람들조차도 청해진 유민이 김제에 오게 된 원인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을뿐더러 그런 비석이 어디에 있는 줄도 잘 모른다.
필자 또한 그것을 찾느라 좀 애먹었으며 심지어는 벽골제 저수지 관광 안내소에 문의했는데도 그들 또한 모르고 있었으며 자료관을 뒤져봐도 청해진 유민에 관한 기록은 없었고 조선시대 벽골 저수지 준설 자료들이 나오는데 내용은 거의가 청해진 장보고 부하들에게 가하던 폭압적 가혹행위로서 벽골지(碧骨池) 건너편에 자그마한 산이 있는데 그 산이 생겨나게 된 것은 벽골 저수지 준설공사에 강제 동원된 인부들의 짚신을 버리던 쓰레기 더미에 죽은 자들의 시신을 함께 묻어 산이 되었다는 전설이 유래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러 정황상 그런 폭압적인 가혹한 노동의 강요는 조선시대가 아니라, 통일신라시대 장보고 부하들에게 가해진 행위들인 것 같은데도 단편적인 지식을 가진 역사학자들의 착각에 의해 잘못된 고증으로 인하여 마치 조선시대의 악행인 것처럼 왜곡된 것으로 짐작된다.

왕건가의 충신이었던 복지겸과 박술희 등등도 호남출신일 가능성이 크다.

우리가 이 역사적 사건을 주목해야 되는 것은 이들이 대부분 아주 용감한 호남의 젊은이들이었으며 이들은 벽골지 준설 공사장에서 상당부분은 죽어 나갔을 것이고 많은 청년들은 탈출하여 전국의 반, 신라 운동하는 사람들에게 흡수 되었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이들은 바다에서 해적을 소탕하고 무역선들을 검문하여 통행세를 뜯어내는 해양관리에 종사한 사람들인데 그들이 산속에 가서 약초를 캐거나 농사를 짓거나, 장사를 할 그런 위인들이 아님으로 당연히 해상을 끼고 무역업을 하는 상단으로 찾아갔을 것이며 그것도 신라에 반감을 가지는 호족들을 찾아가 의탁해야만 신변을 보장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당연히 왕건의 아버지 왕융의 거대한 상단이 운영되던 개성에도 장보고의 옛 부하들이 찾아갔을 것이고 거기에서 활략한 장보고 부하들의 뛰어난 기량과 가치를 알아본 왕건은 훗날 전라남도의 영산강을 거슬러 나주로 치고 들어와 용감한 해양세력을 대거 흡수하여 고려를 개국하는데 협력할 동반자로 전남의 청년들을 선택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왕건과 함께 싸운 유금필, 복지겸, 신숭겸, 박술희, 배현경, 등등이 장보고의 당대 부하들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들 대부분이 고아 출신이란 사실에 관심을 가지고 살펴볼 필요가 있다. 벽골제(碧骨堤)에서 탈출한 장보고 부하들이 찾아 갈 곳은 해양을 지배하는 반 신라계의 상단(商團)들일 수밖에 없다면 압해도 있었던 ‘능창(수달)’나주 영산포에 있었던 오부돈,(오다련의 부친) 순천만의 마로산성에 있었던, 박영규 동해를 지배하던 반 신라계의 왕족 출신 김순식 등에게 의탁하면서 여기저기 떠도느라 가정을 꾸릴 형편이 못 됨으로 자녀들을 함께 데리고 다니며 비렁뱅이 불량배 수준으로 키운 것으로 짐작 된다. 특히 장보고의 청해진(淸海鎭)이 맑고 깨끗한 바다로 거듭나겠다는 문치적(文治的) 요소(要素)의 캐치 프레이즈(Catch Phrase)였다면 압해도(押海島)는 바다를 제압하겠다는 좀 사나운 타이틀(Title)로서 어찌 보면 갱단(Gangster)같이 좀 위협적인 불량기가 느껴지고 좋게 보면 한층 더 용맹스런 감이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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