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 황해 인들이 개국한 코리아 (1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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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 황해 인들이 개국한 코리아 (12회)
  • 광주타임즈
  • 승인 2018.05.02 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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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광주타임즈]한국사이버문학인협회 이사·시인 문경주=■ 투표 잘한 유권자 덕분에 김정은이 판문점에 와서 웃는 모습도 봤다.

이를 요약하면 (車峴(차현)이남 公州江外(공주강외)는 산이 뒤를 보고 돌아서 있는 형국이라서 풍수지리학적으로 역신을 배출할 징조이고 그곳에 사는 백성들은 교활하여 관직에 두지 말아야 하며 항상 경계하라는 내용이다. 훈요 8조의 統合持怨犯(통합지원범)이란 弓裔(궁예) 세력 집단임을 직접 거론하기 곤란하여 줄여 쓴 말로 보이며 원문에 있지도 않은 後百濟(후백제)란 문구를 삽입하여 문장을 왜곡 해석한 것이다. 또한 후백제란 문구를 넣었다 하더라도 그 영토는 일부가 충청도 지역에 걸쳐있어 전라도(호남)에 국한 될 수도 없으며 분명한 것은 통합을 원망하는 범죄를 예방하라는 의미다. 전라도 지역에서는 왕건에게 통합지원에 의한 반란이 없었으며 弓裔(궁예) 세력의 본거지인 충청도가 반란이 제일 많았는데도 오히려 충성을 다한 전라도에 통합지원을 뒤집어씌운 것이다.

결국 왕건의 훈요 8조는 적중했다. 정확하게 車峴以南(차현이남)에 해당하는 충주 호족 유긍달의 딸이 왕건의 셋째 부인이 되어 정종, 광종 형제를 낳았고 그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고려의 제 2대 혜종대왕을 주살하고 왕위를 찬탈했다. 굳이 풍수지리설을 인용한다면 背逆地勢(배역지세)와 背流水(배류수)라고 칭한 百谷溪谷(백곡계곡)이 접한 청주권역의 충주 출생에 해당한다. 유긍달은 충주를 대표하는 유력한 호족으로 서기 900년(효공왕4) 弓裔(궁예)의 부장으로서 지금의 충주, 청주, 괴산 등지를 공격하여 궁예의 부하였던 淸吉(청길), 莘萱(신원)의 세력을 평정할 때 왕건과 인연을 맺었다. 고려 건국 후 그의 딸이 왕건의 셋째 부인 神明順成太后(신명순성태후)가 되어 태자 王泰(왕태),훗날의 定宗(정종)과 光宗(광종), 文元大王(문원대왕)?王貞(왕정), 證通國師(증통국사)등의 다섯 왕자와 樂浪(낙랑)과 興芳(흥방) 두 공주를 낳았다.

왕건의 훈요 8조에서 기록한 해당 문장의 용어와 쓰임새를 정리해보자. 車峴以南 公州江外 山形地勢 趨背逆人心赤然 彼下州郡人 차현이남 공주강외 산형지세 추배역 인심적연 피하주군인 車峴以南: 차현 고개로부터 남쪽, 이곳으로부터 바로 아래쪽을 의미한다. 公州江外: 공주강 중심으로 외곽(外廓)을 의미함으로 다음 지역의 강외(江外)까지를 한정해야 맞다. 그렇게 볼 때 공주강외 와 연기군의 부강외, 부여군의 백마강외, 까지의 원(圓)을 그려 교차하는 지점까지로 해석해야 맞다. 예를 들어 차현이남(車峴以南)에 있는 공주강을 중심으로 圓(둥긍원)을 그리면 다음 백마강외와 부강외 쪽 圓(원)과 맞닿는 교차점까지의 한정 지역을 의미한다. 山形地勢: 산 모양에 따른 지방 거류민들의 특성을 나타낸다.

山形地勢(산형지세)가 배역하다는 의미는 산봉우리가 왕건이 거주하는 개경의 왕궁을 향하지 않고 뒤돌아 서있다는 뜻이며. 그 기준점은 개경으로부터 ‘전북 장수군 장수읍 신무산리 수분치 마을 (뜬봉샘)까지로 해석한 것이다. 사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류 학자들이 그 기준점을 잘못 알고 있는 것이며 궁예의 성장 연고지인 경기도와 충청북도에 접해 있는‘七丈寺(칠장사)’란 절이 있고 ‘롱다리’주변에 신라의 김유신 장군 생가가 있는 바로 이곳을 반란가능성이 가장 높은 곳으로 보고 위에서 말 한대로 유금필 홍유 장군이 지휘하는 반란 진압목적의 특공대까지 주둔시켰을 정도로 이곳의 산형지세를 풍수지리에 근거하여 실제로 궁예의 잔존세력의 반란을 근심했던 것이다.

■ 개경을 기준하면 배류 수 가 흐르는 산하(山河) =서운산(瑞雲山)

경기도 안성시 서운면·금광면, 충북 진천군 이월면에 걸쳐 있는 높이 547m의 산이다. 이 산은 경기도의 최남단인 안성시 서운면과 충청북도 진천군 이월면을 경계로 뻗은 차령산맥의 중간 지점에 위치해 안성시에서 남쪽으로 약 12km 떨어져 있으며 바위가 거의 없어 아담 하고 유순한 산세를 가졌다. 청룡사, 석남사 등의 산사와 청룡사 대웅전(보물 제824호), 청룡사 삼층석탑, 명부전, 관음전 및 조선 현종 때 주조한 것으로 전해지며 무게 약 5톤의 동종등 문화재가 있다. 청룡사는 고려 원종 6년(1265년)에 명보국사가 대장암이라는 이름으로 창건한 절로 공민왕 때 나옹화상이 중건하면서 청룡이 서운을 타고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 하여 산 이름은 서운산, 절 이름은 청룡사로 하였고 임진왜란 때 홍계남이 성을 개축하여 방어전을 전개하였던 반면식 高山(고산) 토성으로서 서쪽에서 남쪽으로 해발 535m에서 460m 지점까지 펼쳐져 있다.

이곳과 접한 충북 진천(鎭川)이란 뜻을 직역하면 그 냇물을 진압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가 있는데 물을 진압한다는 것은 저수지를 막아도 넘치게 마련이므로 바른 뜻이 될 수는 없고 아마도 왕건이 궁예정권을 상대로 쿠데타를 일으키고 청주 권역 사람들의 반란을 진압할 목적으로 진천의 ‘롱다리’를 건너지 못하도록 반란군의 통행제할 목적의 디펜스라인(Defence line을 ‘진천’의 ‘롱다리’주변에서 막겠다는 의미에서 온 지명이 아닐까? 한다. 어쨌든 신라시대는 물론 고려시대에도 백곡계곡 주변엔 저수지가 존재하지 않다가 일본 침략시기에 百谷(백곡)의 주된 골자기를 막아 저수지를 축조했으므로 고려 시대엔 百谷溪谷(백곡계곡)에서 發源(발원)한 물길이 멈춤 없이 곧바로 흘러 진천군의 롱다리를 통과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왕건의 훈요 8조에서 말하는 逆流地水(역류지수)와 背逆山形地勢(배역산형지세)는 바로 개성으로부터의 이곳 서운산, 청룡산을 배역 지세로 본 것이며 백곡 계곡에서 발원한 물길은 정확하게 북쪽인 개경을 등지고 흘러 롱(Long) 다리를 통과하여 청주 강에서 합류하여 금강으로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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