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 황해인들이 개국한 코리아 (1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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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 황해인들이 개국한 코리아 (11회)
  • 광주타임즈
  • 승인 2018.04.25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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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광주타임즈]한국사이버문학인협회 이사·시인 문 경 주=■ 정치엔 관심 없다는 유권자가 앞장서서 투표하여 부패 공장 만든다.

충청도 사람들이 반란을 자주 일으켜 왕건이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겼다. 실제로 차현이남 웅진(공주)강외 중심 지역에서 반란이 끊이지 않았으며 그 대표적인 사건이 충남 홍성군의 환선길, 공주의 이흔암 청주의 경종, 충주의 임춘길 선장, 진선, 형제 등등의 반란이 있었고 특히 경기도 죽산면에 걸쳐있는 ‘차현이남 과 웅진(공주)강외 지역이 왕건의 훈요 8조에서 우려하는 내용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산형지세 병추배역’하다는 말은 산형이 왕건이 거처하는 개성 쪽으로 아우르며 머리를 숙이지 않고 돌아서 있어 배역의 징조가 있다는 의미다. 그곳이 바로 차현 근처의 청룡산 백곡계곡을 이르는 말인데도, 이는 금강 줄기가 전북 장수군 장수읍 신무산리 뜬 봉 샘으로부터 발원하여 왕건이 거처하는 개경 쪽으로 거슬러 흐르기 때문에 산세가 모두 개성을 등지고 돌아서 있다고 여긴 학자들의 잘못된 해석이다.

위에서 분석해본대로 금강 상류는 배역 지세가 아니라, 順應(순응) 지세이고, 공주를 기점으로 물길이 휘돌아 서쪽으로 빠져나가므로 신라의 경주를 기준해서는 배역 지세가 될지 모르지만, 개성으로부터는 왕건을 알현한 신하들이 자연스레 퇴장하는 상태가 된다. 장수군에서 발원한 물길을 따라 고개를 숙인 산세는 충북 옥천군 까지는 왕건이 거처하는 개경을 향하여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물길이 바뀌어 서쪽인 연기군으로 흐를 때부터 왕건을 拜謁(배알)한 신하들이 물러가는 형상으로서 산들은 서남쪽으로 고개를 숙여 개경으로부터 고개를 돌린 것이 아니라, 신라 쪽으로부터 돌아선 자세가 되어 고려의 심장부인 개경으로부터는 아주 자연스러운 풍수지리의 안배 현상이다.

背逆地勢(배역지세)는 어디 일까? 풍수지리학적으로 한양의 案山(안산)은 冠岳山(관악산)이며 한양에 도읍지가 정해지기 이전에는 개경으로부터 먼~남쪽에서 衣冠整除(의관정제)한 신하가 개경의 국왕을 拜謁(배알)하러 오고 있는 形局(형국)이였다. 그런데 충청북도와 경기도의 경계에 걸쳐있는 차령산맥의 주봉이 시작되는 靑龍山(청룡산)과 瑞雲山(서운산)은 개경으로부터 남쪽으로 돌아서있는 형국이 되는 것이다.

관악산이 한강과 임진강을 건너 개경을 바라보며 머리를 숙인 신하의 형상이라면 청룡산과 서운산은 아예 개경 따위는 무시하고 남쪽을 바라보는 形局(형국)인데다가 충북 진천군으로는 수맥이 빠져 나가듯 물길이 개경을 등지고 흘러 마치 靑龍瑞雲(정룡서운)의 王氣(왕기)가 개경의 먼발치에서 조용히 새어나가는 아주 기분 나쁜 산세와 배류수인 셈이다.

특히 ‘칠장사’ 주변 사람들은 자연히 ‘궁예’ 지지 세력으로 볼 수 있으며 그 산세가 굽이돌아 흐르는 백곡계곡이 있다. 이곳에서 발원하는 물줄기는 정확하게 개성과의 반대쪽으로 굽은 형상으로 이곳이 고려 시대 이전부터 유명한 교통 요충지임을 말해주는 증거로 농다리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1천년이 훨씬 넘는다는 것이며 충북 진천군에서는 지방 문화재로 등록되어 매년 ‘농다리’ 축제를 열기도 하는 등 한 반도의 고대 교량으로서는 최대의 크기와 가장 오래된 역사적 유물로 알려져 있다.

한 반도의 고대 교통요지인 청주권역으로 관통하는 이곳 영남대로 주변에서 불량배들이 많아 그 지역에서 七丈(칠장)의 도적이 날뛸 정도로 조정의 권위를 무시하고 함부로 腕力(완력)을 앞세우려는 기질을 가진 무리들이 많았다는 뜻이기도 하여 왕건의 거사 이후에 끊임없이 반란이 일어났던 끔찍한 기억뿐인데 그 산세마저도 풍수지리학적으로 역신의 形局(형국)이라면 이것은 장차 왕실이 크게 경계해야할 대상이라고 여겨져 자신이 죽은 후에라도 어떤 변란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노파심에서 나온 訓要(훈요) 유언으로 봐야한다.

특히 차령산맥에서 발원하는 물줄기를 가로지른 농다리를 건너 약, 4km정도 올라가면 음성군 삼성면에 있는 車峴(차현) 고개가 나오며 당시의 차현과 농다리는 한 반도에서 그만큼 유명한 곳이므로 왕건이 궁예 정권에게 쿠데타를 감행하여 성공시키자마자, 제1차적으로 궁예의 연고지였던 이곳 충북 鎭州(진주)<오늘날의 진천군>에 유금필, 홍유, 장군에게 군사 1,500명의 기동 타격대를 주둔시켜 반란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했고, 곧 이어서 충남 예산군에 유민을 가장한 500여 호의 방위군들을 이주시켜 그 곳으로부터 있을지도 모르는 민란을 방지하려 했던 것으로 이 또한 차현이남 공주강외와 일치한다.

바로, 이 차현이남 공주강외 지역에서 반란이 끊임없이 일어났으므로, 東國輿地勝覽(동국여지승람) 오늘날의 천안시인 木天縣 姓氏條(목천현성씨조)기록에 의하면 그 지역 사람들이 반란을 자주 일으켜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은 믿을 수 없는 짐승 같다는 의미로 (노루장), 豚(돼지돈), 牛(소우), 馬(말마) 象(코끼리상),등의 성씨를 내렸으나, 훗날 變姓(변성)하여 소우는 于(어조사우)로 코끼리상은 尙(높일상), 돼지돈은 頓(조아릴돈), 노루장은 張(베풀장)으로 바꿨다는 것이다.
훈요 8조: 차현이남과 공주강 밖은 산형과 지세가 배역하니 인심 역시 그러하다. 그 아래의 州(주)ㆍ郡(군)사람들이 조정에 참여하거나 왕후ㆍ국척과 혼인하여 나라의 권세를 잡게 되면, 변란을 꾀할 이유로 통합당한 원망을 품고 임금이 거둥하는 길을 범하여 난리를 일으킬 것이며, 또 일찍이 관청의 노비와 津(진) 驛(역)의 雜尺(잡척)에 속했던 무리들이 권세 있는 사람에게 의탁하여 身役(신역)을 면하거나 왕후나 궁원에 붙어 말을 간사하고 교묘하게 하여 정치를 어지럽혀서 재변을 일으키는 자가, 반드시 있을 것이니, 비록 선량해 보이는 백성일지라도 벼슬자리에 두어 세도를 부리게 하지 말라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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