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종교는 생명의 소금이요, 힘이다. 한데 아시시의 프란치스코(1181~1226)는 유복한 상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젊은시절 프란치스코는 돈 잘 쓰고 친구와 잘 어울리며 흥겹게 지내는 전형적인 부잣집 아들로 살았다.
그러나 군인으로 전쟁에 참가했다가 포로생활을 경험하고, 또 고향에 돌아와서 큰 병을 앓고 난 후 심경에 변화가 일어났다.
이전에 한량생활을 하던 때와 달리 갑자기 과묵해진 그를 보고 친구들이 놀리며 여자생각 때문에 그러느냐고 물었다.
그럴때면 프란치스코는 "물론이지, 자네들이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아주 멋진 여인과 결혼하려고 한다네"하고 답했다.
그가 평생 같이하려는 신부는 다름아닌 '가난이라는 귀부인'이었다. 시골의 한 작은 성당의 예수 성상이 그에게 "프란치스코야, 내 집이 무너지고 있으니 고쳐주렴"하고 말하는 환상을 경험하고는 아버지의 가게에서 돈을 가져다가 기부했다.
아버지가 그를 심하게 나무라자 그는 아예 집을 떠나 본격적인 걸인행각에 나섰다. 그는 모든것을 버리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가슴에 품고 있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마태 10:8-10) 그는 누더기 옷에 맨발로 설교를 하고 다녔다.
그렇지만 사제가 아닌데 설교를 하는 것은 교회법 위반인 셈이다. 그는 추종자들과 함께 직접 교황을 찾아가 새로운 수도회를 만들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카잔차키스는 그의 소설 '성프란치스코'에서 지독한 발 냄새가 나는 노숙자 행색의 프란치스코가 교황을 만나는 장면을 성스럽게 그린바 있다.
교황으로서는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사실 수십년 전에 거의 똑같은 일을 겪었기 때문이다.
'리옹의 빈자'라 불리는 왈도라는 인물이 부자로 잘 살다가 어느날 각성하여 모든 재산을 내던지고는 교황 앞에 나타나 설교할 권리를 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올바른 신앙의 길이 아닌 것 같다고 설득하여 돌려보내자 왈도는 현 교황은 말세의 적 그리스도가 틀림없다고 주장하며 돌아다녔다.
오라도파는 중세 최대의 이단 종파로 커졌다. 애초에 이단의 수괴와 성인 사이에는 종이 한장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이제 세상에서 가장 미천한 자의 이름으로 교황이 즉위했다.
새 교황은 이탈리아 이민자 출신 철도노동자 부모의 5남매 중 한명으로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났다. 산미켈 산호세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신학생들을 대상으로 철학과 문학을 가르쳤다. 1969년 사제서품을 받은 그는 주로 아르헨티나에서 사목활동을 했다.
독일과 칠레 등에서 인문학, 철학 등을 두루 공부했으며 독일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에 능통하다.
1998년 부에노스아이레스 대주교를 역임한 후 3년 뒤 추기경으로 임명됐다. 그는 소박한 삶을 추구하며 빈자들을 돌봤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추기경 관저에서 살지않고 시내 중심가의 작은 아파트에서 생활했다. 전용 차량을 마다한 채 털털거리는 버스를 이용했고 요리를 직접 했으며 옷도 수선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빈민가에서 어려운 이들을 도와 '빈자들의 아버지'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는 동성결혼과 낙태 및 피임 등에 비판적이어서 교리적으로는 전임 베네딕토 16세와 비슷하다.
하지만 사회개혁을 요구하는 등 사회문제에서는 진보적 태도를 보였다. 2007년 라틴아메리카 주교단회의에서 그는 "우리는 지금 세계에서 가장 불평등한 곳에서 살고 있다"며 "높은 성장에도 불구하고 빈곤의 고통은 가장 더디게 줄어들고 있다"고 불평등을 지적했다.
교리에서는 보수적이고 사회문제에서는 진보적이기 때문에, 전임 교황과 다른 성향의 인물이 교황으로 뽑힌다는 '진자의 법칙'을 그에게 적용하기는 다소 애매하다. 아무튼 새 교황 프란치스코로 인해 세상이 조금 더 밝아지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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