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100년 (대한민국 근현대사) 8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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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100년 (대한민국 근현대사) 80회
  • 광주타임즈
  • 승인 2020.06.17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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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타임즈]통일코리아 지도자회 이사장 문경주=아직도 밤이 되니 쌀쌀했다는 글을 이해한다면 박정희가 만주로 간 것은 1939년 4월 또는 5월 이전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밤이 되니 기차 안이 추었다는 대목도 그렇고 밤기차의 기온을 이미 알고 있는 일본인 형사는 아예 겨울 외투를 입고 있었다는 정황은 분명 늦은 봄을 배경으로 합니다.
박정희는 의무교사 복무기간이 1939년 3월31일이면 끝나기 때문에, 만주로 올라가서 군관학교 지원을 위해 백방으로 알아보고 다니다가 강재호 상위를 만났을 것이고 간도특설부대에 의탁하여 활동하면서 어떤 공을 세워 만주국 군관학교 지원 자격을 얻어 시험을 친 것으로도 유추해볼 수도 있는 이유입니다.

관련하여 통일학회 연구소장이 썼다는 논문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1939년 2월 29일 만주국 치안부군정사 징모과에 박정희가 제출한 두툼한 지원 서류가 도착했다. 그 안에는 호적등본, 이력서, 교련검정 합격증명서 등이 들어 있었다.

내용은 “일본인으로서 비굴하지 않은 정신과 기백으로 대일본제국을 위해 멸사봉공의 굳은 결심을 했습니다. 목숨을 다해 충성할 각오로 군관이 되어 만주국을 위하고 나아가 조국 일본을 위해 충성을 다 할 것이며 일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겠습니다.”란 내용으로 구구절절 충성을 맹세하는 글이 들어 있었다는 것이었다.

박정희는 만주 군관학교에 지원하기 위해 두 번째로 보낸 편지와 함께 “죽음으로써 멸사봉공하리라”는 뜻으로 쓴 혈서도 들어 있었다는 겁니다. 그 지원서와 혈서는 1939년 3월 31일자 만주신문에 보도되었습니다. 거기에 나타난 그의 열렬한 충성심이 “징모과 직원들을 감동시켰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로 제출한 지원 서류를 읽고 감동한 사람들 가운데 당시의 만주군 간도특설대장 강재호도 있었습니다.

박정희 지지자들 주장처럼 의무교사 봉직기간이 3년이라서 1940년 4월까지 교사로 근무해야 하고 그렇다면, 1939년 2월 29일에 만주 군관학교에 지원하는 서류를 제출할 까닭이 없습니다. 반대로 1939년 2월에 만주국 군관학교에 지원했다는 사실은 그분의 교사의무 재직기간이 2년이란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며 동시에 1939년 4월 1일 이후에 만주로 떠나 간도특설부대에 지원 입대하여 몇 개월 동안 공을 세우고 1939년10월 5일 만주국 군관학교 입학시험 자격을 얻어서 간도특설부대 제1대장인 강재호 상위와 함께 시험 치러 왔었다는 정황으로 추정하기에 충분한 정황적 의심이 됩니다.

(일제강점기에 사범대학교 졸업자가 의무교사 기간이 얼마인지를 밝히는 자료) 일제 때 보통학교(현재 초등학교) 교원은 훈도(訓導), 중등학교 이상의 전문학교나 대학의 교원은 교유(敎諭)라고 불렀다. 교유는 대학 수준의 교육기관을 졸업한 자가 취임할 수 있었다. 반면 훈도는 관·공립 사범학교나 고보(高普)의 사범과를 졸업하면 자격을 얻을 수 있었다. 사범학교의 경우 등록금이 전액 면제였으며 또 정원의 일정 비율(대개 30%)을 관비생으로 선발하여 매월 15원씩의 학비 보조금을 지급하였다.

일제 말기에 국민학교의 교사와 학생들 사진은 속초 영랑국민학교 제1회 졸업사진(1944년 3월)사범학교 졸업생은 졸업 후 훈도로 일정 기간 의무복무를 하게 돼 있었는데 사비생은 2년, 관비생은 4년이었다. 5년제 사범학교를 졸업할 경우 1종 교원면허를 취득하였다.

반면 사립 고등보통학교에 설치된 사범과를 졸업할 경우 2종 교원면허를 취득하였는데 이 경우 교원 임용에서 차별을 받았다. 일제 말기엔 전국의 면(面) 단위별로 보통학교(소학교, 혹은 국민학교)가 하나씩 있었는데 훈도 가운데는 일본인과 조선인이 섞여 있었고 교장은 대부분 일본인이었다. 당시 훈도는 농촌의 경우 지역사회에서 몇 안 되는 고학력자로 지식인이며. 유지로써 대우받았다. 훈도의 경우 국어, 산수는 물론 음악, 미술 등 전 과목을 담당하였다.

문경보통학교 훈도 출신인 박정희 전 대통령은 풍금 연주나 그림 솜씨가 상당한 수준이었다고 하는데 이는 대구사범 시절에 배운 것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만주 군관학교 생도들은 군인으로서의 담력을 키우는 전투력을 증진시키는 훈련 목적으로 예비부대란 지원군 형태로 간도특설부대와 함께 전투에 참가시켰다고 합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친일 의용부대 개념인 간도특설부대의 극악무도한 ‘토벌작전’에 정예 만주국군관학교의 생도들이 실전실습 훈련목적을 구실로 전투에 직접 참가했다는 대목입니다.

따라서 박정희도 간도특설부대의 공비토벌 작전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아무리 부인해도 민간인 학살극에 참가할 수밖에 없는 훈련과정이 있었다는 의심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여하튼 1940년 봄부터 대 사하전투에서의 참패를 복수하려고 관동군, 만주군, 간도특설부대가 총동원되어 조선인민 혁명군을 상대로 대규모 춘계 토벌작전이란 것을 벌였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박정희는 1940년 4월 1일에 만주 군관학교에 입학한 후에 소위 담력실습 전투훈련으로는 생도 전원이 참가하게 되어 있었으므로 박정희 하나만 빠질 수 있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더 중요한 사실은 간도특설대가 민간인 대상으로 공비색출이란 극악무도한 작전에서 공을 세운 소위 유훈 병사를 양성하여 용감하고 우수한 친일 사상이 투철한 대원을 선발하여 정예 만주군관학교 지원 자격을 주는 당사자인 강재호 대장이 유훈(遺勳)추천 말고는 입학자격이 없는 박정희를 직접 데리고 시험장에 들어왔다면 반드시 그 이유가 있어야 했을 겁니다.

아무리 간도특설대장이라도 추천 대상이 되는 유공이 있어야 추천할 수 있을 것이며 아무런 공적도 없는 사람을 추천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당시 간도특설대의 군기가 얼마나 잘 잡혀 있었느냐 하면 대원중에 실수로라도 군율(軍律)을 어긴 자는 스스로 활복(豁腹)자살을 하도록 유도했다는 것입니다.         

             
<▶81회에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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