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희생자들 암매장 사실로…행불자는 어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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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희생자들 암매장 사실로…행불자는 어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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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4.03.04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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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위, 공식활동 보고서 공개 - 중
남몰래 묻힌 희생자, 발굴 성과는 없어
유해 뒤바뀐 행불자 발견…소기의 성과
‘민간인 겨냥’ 헬기 사격 개연성 확인도
허연식 5·18 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 조사2과장이 지난해 5월 16일 오후 서울 중구 5·18 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에서 열린 대국민보고회에서 '5·18 민주화운동 가(암)매장 제보현장 지표조사 및 유해발굴조사 현장'을 설명하고 있다.  /늇;ㅅ,
허연식 5·18 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 조사2과장이 지난해 5월 16일 오후 서울 중구 5·18 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에서 열린 대국민보고회에서 '5·18 민주화운동 가(암)매장 제보현장 지표조사 및 유해발굴조사 현장'을 설명하고 있다. /늇;ㅅ,

[광주타임즈] 계엄군 총칼에 숨졌지만 장례조차 못 치렀던 희생자 유해는 끝내 찾지 못했다. 복수의 진술로 암매장은 확실시되나 명백한 진실로서 확인 못해 사후 수습 또는 훼손 가능성이 남았다.

다만 조사위는 뒤바뀐 채 묻힌 행방불명자(행불자) 유해의 안장 위치를 바로잡고, 계엄군 헬기 사격의 개연성을 재확인하는 등 성과도 냈다.

■ 피투성이 희생자들, 몰래 묻혔다는데…

조사위 결과보고서에 따르면 조사위는 암매장 추정지 53곳을 조사하고 암매장 관여 계엄군의 증언 확보에 힘썼다.

특히 광주교도소 주변 암매장을 직접 지시한 계엄군 2명, 유해를 묻거나 목격했다는 장병 22명의 증언이 나왔다. 그러나 이들이 지목한 곳에서는 유해가 없었다.

발굴 가능성이 가장 컸던 교도소 오수처리장 주변 지하에는 건축 폐기물과 쓰레기가 묻혀 있었다. 교도소 관사 주변과 본관 화단, 하천변 등지도 유력 암매장지였지만 흔적은 없었다.

광주교도소 솔로몬로파크 공사장에서 발견한 무연고 유해 261기의 유전자도 행불자 가족과 일치하지 않았다.

해남에서는 31사단 방위병이 ‘시위 참여 민간인을 암매장했다’고 증언해 발굴 조사를 벌였지만 발견된 무연고 유해 9기 모두 행불자는 아니었다.

조사위는 계엄군의 여러 진술에 따라 암매장 자체는 있었던 것으로 봤다. 다만 유해를 결국 발견 못해 암매장 건은 규명할 수 없다고 결정했다.

조사위는 암매장 유해가 군의 재수습 과정을 거쳐 어디론가 옮겨졌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며 후속 조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 유해 뒤바뀐 행불자, 생존자 확인은 ‘성과’

조사위는 행불자의 행적을 역추적, 일부가 이미 국립 5·18민주묘지에 묻혀 있거나 살아있는 사실을 밝혀냈다.

조사위는 광주시 5·18 보상심의위에 보상 신청이 접수된 행불자를 비롯해 1980년 5월 18일부터 비상계엄 해제일인 1981년 1월 21일까지 자취를 감춘 이들을 전수조사했다.

행불자는 5월 20일 하루에만 47명(19%)이 발생한 것으로 집계됐다. 이어 21일 39명, 18일 38명 순이다.

날짜별 행불 장소도 분석했다. 진압 첫날인 18일은 시내 중심가, 계엄군이 광주 외곽을 봉쇄한 21~22일은 시내와 광주나들목 주변에서 행불 신고가 많았다. 20일에는 유동사거리와 전남대, 광주역 일대에서 행방불명됐다는 신고가 있었다.

40여 년 만에 유해를 찾은 행불자도 있었다. 민주묘지 내 무명열사 묘 5기 중 3기는 기존 행불자로 분류된 희생자로 확인됐다.

무명열사 묘소와 열사 묘에 안치된 유해가 서로 뒤바뀐 사례도 있었다. 행불자로 신고된 김광복 군은 희생자 양창근 열사가 안치된 1-38번 묘소에 묻혀있었다. 반면 양 열사는 김 군이 안치된 무명열사 묘소(4-96)에 잠들어있었다.

생존자도 찾았다. 조모(당시 9세)씨는 5월 27일 계엄군에 의해 상무대로 끌려갔다가 도망친 뒤 위탁시설 ‘소년의 집’을 거쳐 현재까지 부산에서 살고 있다. 다만 행불자 묘역에 묘비로만 남은 이창현(당시 7세) 군의 입양 가능성도 살폈지만 기록에 없었다.

조사위는 5·18 행방불명자 자료와 관련 제보를 꾸준히 관리할 전담 기구 설치가 필요하다고 정부에 권고한다.

■ ‘민간인 겨냥’ 헬기 사격 개연성 확인

조사위는 항쟁 당시 출동 육군 헬기의 시민군 지향 사격을 간접 뒷받침할 정황·증거들을 다수 확인, 진상 규명 결정을 했다. 당시 출동한 모든 기종 헬기(500MD·AH-1J·UH-1H)에서 위협사격이 이어진 개연성을 짐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5월 22일 오전 계엄사령부가 전교사령부에 내린 ‘Hel기 작전계획을 실시하라’ 문서에는 “시위 사격은 20㎜ 발칸, 실사격은 7.62㎜”라고 적혔다. 특히 재진입 작전을 앞둔 5월 26일 오후 전교사령부 작전회의에 참석한 항공대장은 공격헬기 조종사에게 구체적인 발포 명령을 하달했다.

건물 번호가 매겨진 지도를 받은 조종사가 지상부대 공중 엄호 도중 지원 사격 요청을 받았고, 위력 비행 중인 조종사로부터 ‘무등산 지점서 사격 타겟(표적) 확인 지시가 있었다’는 증언도 확보했다.

조사위는 살상 등 위협 이상의 사격 허용 지시가 있었다고 봤다.

5월 21일 광주천변 등을 가리킨 헬기 사격 목격담 역시 일부 조종사들의 진술과 일치했다.

특히 ‘최후항쟁지’ 인근 전일빌딩 10층에 남겨진 탄흔 역시 발견 위치와 사격 각·탄도 추정 내용 등으로 볼 때 헬기 사격 사실이 있었다고 거듭 입증했다. 주된 부정 논리였던 헬기 연사 속도 역시 실험을 통해 허위인 것으로 밝혀냈다.

조사위는 ‘20㎜ 건 드라이브(Gun drive)’ 부속 고장 원인은 사격이 아니라면 찾을 수 없고, 20사단 전투상보에 적힌 ‘5·23 20㎜ 발칸 탄약 항공대 보급’으로 볼 때 AH-1J 공격헬기의 사격도 개연성이 있다고 봤다.

다만 육군항공대 장병들의 실사격 시인, 사격 실행 문서 등 직접 증거는 찾지 못했다. 당사자가 부인하거나 면담 조사를 거부해 한계는 있었다.

나주 비상활주로, 전남대병원 등지에서의 헬기 사격 목격담은 증거가 부족, 단정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 관련기사 추후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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