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100년 (대한민국 근 현대사) 4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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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100년 (대한민국 근 현대사) 44회
  • 광주타임즈
  • 승인 2019.10.16 1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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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광주타임즈]민주평화노인회 전남 무안지부 회장 문경주=더구나 미국 측에서는 의도적으로 한국 군대에 무기를 제공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폐기 대상에 가까운, (1차 세계 대전 때 사용하던) 소총 몇 만여 자루만 제공했으나, 그것도 10만 군대를 무장 할 만큼 충분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고장 나서 사용불가 가 태반이었고, 사용 가능한 총기류는 불과 5만 정 내외였다고 합니다. 그나마 실탄도 없어서 당시의 이범석 국방부 장관이 한국에 주재하는 미국 군사 고문관들을 불러 전방 부대의 무기체계를 실사시켰으며, 그 실상을 보고 난 미국 고문관들도 무기 없는 군대의 심각한 상황임을 인정한다는 확인서를 받아 미국 측에게 무기제공을 건의했다는 겁니다. 그러나 미국의 답변은 냉담한 노(No)였습니다. 표면적인 이유는 대한민국에 무기를 제공할 경우 고집불통인 이승만 정권이 북진 통일하겠다며 북한에다 총질이나 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도발에 대한 책임이 뒤따라 극동 평화가 깨진다는 논리였습니다. 이승만 정권이 북진 통일을 국가 목표로 삼고 떠들어댄 게 사실이기 때문에, 이범석 장관은 고심 끝에 사회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대 간첩 저지 작전용으로 필요하다는 구실을 붙여 일본이 사용하던 인천의 조병창(조선 병기제조창)을 가동하겠다고 제안했습니다. 조병창은 2차 세계대전 때 일본군이 무기를 만들거나, 정비를 위해 운영하던 공장으로서, 훗날 한국종합기계(주)로 개칭되어 자동차 엔진을 만들어낼 정도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공작기계 생산이 가능한 시설을 갖추고 있었을 뿐 아니라, 실제로 일본이 총기류를 정비 및 개조하던 곳이기도 했습니다.

그 협상에 의해 미국으로부터 허가받은 것은 고장 난 총을 수리하는 정도로 시작하여 조잡하나마 약간의 총기류와 실탄, 그리고 수류탄과 TNT 정도를 만들었다는 겁니다. 조선은 천자총통 지자총통 화살에 로켓을 달아서 쏘는 ‘신기전’이란 무기를 만들어 사용하던 나라이니 일본이 사용하던 기계제작 시설이 남아 있었고 기술자가 있었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겠지만, 그에 대한 정확한 자료는 찾을 길이 없습니다. 이범석 장군은 이승만 정권의 국무총리를 겸직했던 국방장관으로서 어떻게 하든 국산 무기를 제조하고 싶어 했지만, 돈도 없고 재료도 없고 기술도 변변찮아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거기다가 미국 측, 군사 고문관의 검열을 받는 조건으로 조병창이 운영되어 제약이 따랐고 한국군의 무기체계를 시급히 개선하려는 욕심에 미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는 겁니다. 그나마 미국이 제공하는 원자재에 의존하여 제한된 총기류만을 수리 재생이 가능하도록 허락된게 고작이었습니다. 따라서 북침을 하고 싶어도 그럴만 한 무기가 전혀 안 되었던 겁니다.

하지만 휴전선에서는 연일 총격전이 벌어지고 있어 일촉즉발의 전쟁발발 위기가 조성되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에게 무기를 가지지 못하게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철없는 아이들이 무기를 가지게 되면 자꾸만 사용하고 싶은 충동이 생겨 인명을 살상할 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맥락에서인지 북한은 거의 날마다 총질을 가해 왔습니다. 북한군의 무기는 엄청났습니다. 소련군이 철수하면서 그들이 사용하던 군사무기를 고스란히 북한군에 넘겨주었기 때문이었지요.

그렇게 우월한 무기를 가진 북한으로서는 기고만장하여 걸핏하면 남한 측에 공격을 가해 왔고, 휴전선에서는 총질이 멈출 날이 없었습니다. 어쩌면 당시의 북한으로서는 남한군대의 무장 상태를 어린아이들 짱돌 팔매 수준으로 봤을지도 모르며,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무적의 탱크를 비롯하여 막강한 무기들을 사용하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도 이승만 정권은 북한을 탈환 하자고 부르짖었지요. 물론 속뜻이야 정권 안정을 염두에 두고 독재 권력의 강화를 목적으로 북진 통일을 부르짖었을 겁니다. 하지만 무기도 없는 늙은이의 공허한 외침이 얼마나 한심하고 웃기는 일이었겠는가? 이와 같은 남북한의 무기체계 차이로 볼 때 전쟁이 일어나기만 하면 수일 내에 남한이 적화된다는 것은 군사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기정사실이었으며 비밀도 아니었습니다. 더구나 북한의 전쟁 준비가 완료된 상태에서 그 실행을 미루고 있어서, 군부 요인들은 북한의 남침에 대한 불안으로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 당시 가짜영웅 박정희는 북한에 침투한 월레비 소장 휘하의 첩보 요원들로부터 보고되는 북한군의 우월한 무기체계와 군사조직 상황을 훤하게 꿰뚫어보고 있었을 겁니다. 반면에 남한의 방어준비는 전무했으며 소총부대가 전부였는데, 그마저도 명목만 10만 대군이지, 전투 가능한 군사력은 5만도 채 안 되었다는 겁니다. 그런 사실을 손바닥 보듯 하고 있던 상황에서 그 탁월한 변절 경력이 발동했을 겁니다. 어쨌든 우리나라 국군 중에 약, 3천여 명 가량이 남로당에 가입해 있었으며 가짜영웅 박정희는 군부 총책으로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훗날 대통령이 되어 이렇게 해명했다고 합니다. ‘내가 남로당에 가입한 것은 공산주의자여서가 아니라, 형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였다. 라고 말입니다. 가짜영웅 박정희는 침략자에게 혈서 쓰고 충성을 맹세했을 뿐 아니라. 침략해올 북괴를 영접 준비한 역적은 아니었을까요? 그렇다면 왜, 자신의 형 원수를 갚아야 했을까요? 그의 형은 구미에서 신문사 지국장을 하면서 은밀하게 독립운동을 했다고 하는데, 뚜렷하게 어떤 투쟁 유적을 남긴 것은 없습니다. 해방 후에 머리가 돌아가는 사람들치고 독립운동하지 않았다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심지어는 친일활동을 했던 사람들조차도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위장 친일을 했다고 우겨대는 판국이었으니, 누가 진짜인지를 가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여튼 가짜영웅 박정희 형은 해방 후 남로당에 가담하여 대구폭동사건에도 연루되는 등 김일성 노선을 지지하다가, 충청도에서 파견된 경찰 토벌대에게 사살 당했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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