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949년 6월부터 미 제 8군단의 병력을 7만에서 15만으로 증강 2) 1949년 6월부터 미 제 8군단을 극동 공군과 해군을 통합해 실전 배치 3) 1949년 8월부터 험준한 산악지역 전투수행능력 배양을 목적으로 산악 훈련을 실시하면서 한국의 산악 지형과 비슷한 일본 후지산 훈련장 개설 4) 1949년 10월 말 오키나와 기지를 두 배 정도로 확장함. 이러한 일련의 조치들은 2차 대전이 끝난 시점에서 오히려 축소되어야 정상임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맥아더의 전투시설 확대를 승인했다는 점에서 한국 전쟁을 준비해 왔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한국전쟁을 주도한 것은 미국의 워싱턴 정가이지만, 한국전쟁을 통해 멋진 승부를 내어 그 인기로 대통령을 해 보고야 말겠다고 꿈꾸던 맥아더의 야심은 더 조급해 공산 진영으로부터 침략해 오기를 학수고대 하며 침략을 유도했다고 보는 겁니다. 맥아더는 멋을 부릴 줄 아는 사나이입니다. 그런데 인류 역사에서 멋을 부리는 사람이, 아니 인기에 영합하려는 사람이 세계 역사에 공헌한 경우가 얼마나 되는지 아십니까? 위대한 지도자가 되려면 인물부터 잘생겨야 된다는 전제 조건도 들어본 바 없으며, 얼굴 예쁜 여자가 지략도 뛰어나다는 통계를 보지 못했습니다.
맥아더가 잘 생긴 것은 맞는데 폼만 잴 줄 알았지 지략이 뛰어나지는 못했으며, 단 하나, 영화배우처럼 자신의 외모를 다듬어 세상에 잘 보이려는 연출만은 수준급의 군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2차 대전이 진행 중이던 1941년 극동군 사령관에 임명되면서, 첫 마디가 현재 극동지역에 배치해 놓은 미국 병력의 절반 정도로도 일본 군대 정도는 데리고 장난놀이 할 수 있다며, 전임자들의 무능을 질타했습니다. 그렇지만 결과는 정반대로 극동 지역에 미국의 막대한 전력이 있었지만, 그는 패배했습니다. 그것도 필리핀에서의 패배는 맥아더의 판단력 부족과 부패까지 연루되어, 안일하게 흥청거리다가 호되게 당한 겁니다. 그는 필리핀 정가로부터 뇌물까지 받아 챙기는 등 마치 점령군 총독처럼 정치인들과 어울리며 놀아나다가, 일본의 공격을 받고 대패해 엄청난 군사와 전투 장비를 잃고 포위되자, 부하들을 버리고 필리핀을 탈출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주둥이는 얼마나 잘 놀렸던지...저 유명한 한마디가 “나는 곧 돌아온다.”라는 말을 남겨 미군 병사들이 화장실을 가면서도 아이 윌 컴백 쑨(I will com back soon)이라고 하는 나는 곧 돌아온다는 말로 비웃음을 샀다는 일화를 남길 정도였다고 합니다.
한국전쟁에서는 어떠했을까요? 북한군이 드디어 38선을 넘었다는 보고를 받고, 북한군은 오합지졸들이라서 한 손을 뒤로 제쳐 묶어도 물리칠 수 있다며 미군 몇 백 명과 기갑사단 하나만 보내도 북한군들은 만주까지 줄행랑을 칠 것이라고 큰소리치면서 휘하의 미군 장병들에게 북괴군을 간단하게 해치우고 크리스마스를 고향에 돌아가서 보내자고 너스레를 떨었다는 겁니다. 이는 좋게 보자면 전쟁에 임하는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아 주기 위해 지휘관으로서 허풍을 좀 떤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언행들을 일관되게 살펴본다면 전략도 능력도 지혜도 변변치 않으면서 막강한 미국의 군사력만 믿고 까불어 대는, 마치 깡패 ‘오야붕’ 밑에 따라다니며 바람잡이 노릇 하는 졸개 정도가 허세를 부리면서 헛발질 해대는 졸장이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겁니다. 사실이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세뇌용 매체에 따라 난체하는 무식한 사람들의 헛소리가 여론을 지배하고 있으므로 한국의 어리석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인천상륙 작전은 불가능한 것이었는데 맥아더의 굳은 의지로 관철시킨, 세계 해전 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승전이며 맥아더만이 해낼 수 있었던 성공적인 상륙전투였다고까지 극찬합니다. 하지만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과연 세계의 해전사례를 연구하고 공부했습니까? 한국인들 상당수는 언론에서 기사를 내면 그대로 따라 합니다. 왜? 뭘 아는 척은 하고 싶은데 정작 자신은 공부하기 싫어해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언론의 꼭두각시가 되어 ‘응~그래 언론 네 말이 맞아’ 하지요.
<▶37회에서 계속 이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