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 황해 인들이 개국한 코리아 (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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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 황해 인들이 개국한 코리아 (8회)
  • 광주타임즈
  • 승인 2018.04.04 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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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광주타임즈]한국사이버문학인협회 이사·시인 문 경 주=■ 호남을 척한 박정희는 총 맞았고, 전두환 노태우 이명박 박근혜는 구속되었다.

■ 호남을 차별하지 않은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대통령은 모든 국민들이 지지한다.

몽골군이 공격하고자 했던 것은 온양온천의 목욕탕이 아니라, 아산군 공세면의 稅穀倉庫(세곡창고)였으며 그 곳에 저장해둔 고려의 稅穀(세곡)이 강화도에 있던 고려 조정에 보급되는 海路(하로)를 관장하는 수군 기지였을 것은 거의 확실하다.

‘고려사절요’에서도 몽골군이 공주를 거쳐 갔다는 내용은 없으며 분명히 공격 지점으로부터 남쪽으로 내려와 차현(車峴)으로 나아갔다고 되어 있으므로 그들이 차현(車峴)고개의 망이산성 기지에서 출진했다면 당연히 차현(車峴)으로 나아가는 것이 맞다. 무엇보다도 공주군의 차령(車嶺) 고개 인근에는 몽골군이 주둔할만한 군사기지가 없다. 하지만 차현(車峴)고개에는 망이산성(望伊山城)이 있으며 그곳은 고구려 신라, 백제,가 서로 빼앗아 국경을 삼던 산성이고 몽골군이 ‘망이산성’의 본영격(本營格)인 죽주산성(竹州山城)을 공격하다가 실패했다는 기록은 있으나, 망이산성을 공격했다는 기록은 없는데 그 까닭은 삼국시대엔 망이산성이 국경검문소에 해당했지만 전국이 통일된 고려에서는 본영인 죽주산성이 있기 때문에 그곳에 국경검문소가 필요 없어 사실상 비워둔 산성이므로 몽골군은 그냥 무혈 입성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망이산성(望耳山城)이 있었던 차현(車峴)고개를 통하지 않고는 남쪽으로 내려오는 길이 없었다. *고려시대까지 한반도 서쪽으로 수원, 평택, 천안, 공주, 이남으로는 남북 관통도로가 없었는데 그 까닭은 서해와 가까워 바닷길로 항해했으므로 육로는 차현(車峴)고개의 망이산성(望耳山城)통행로만 존재했던 것이다.

■몽골군 3차 침입
몽골군은 1236년(고종23) 6월에 또다시 고려에 대거 침략해왔다. 이들의 군세는 예전보다 훨씬 증원된 대규모였음으로 6월 한 달 사이 북계(北界)여러 지역을 점거하며 서부 지역까지 내려왔고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고려의 북계(北界) 성들을 집중 공략(攻略)하는 한편 7월부터는 동진군을 투입해 동부지역을 공격했으며 8월 말에는 한강 이남으로 진출했고 9월 들어,경기, 충남지역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10월엔 전라도 지역까지 공격했다.

몽골군 침투로를 살펴보면 죽주산성(竹州山城)을 통과해 불과 10km 내외 아래쪽에 위치한 차현(車峴)고개의 망이산성(望耳山城)을 통해 밀고 내려온 것을 알 수 있으며 온수군을 공격한 것은 9월이고 대흥군과 효가동(공주)을 공격한 것은 12월이다. 따라서 망이산성을 점령해 몽골군의 중간 기지로 활용하면서 8월에 죽주산성을 공격하다가 실패하고 9월에 온수군을 공격했고 10월에 고란사(전북 부안)까지 내려갔다가 12월엔 대흥군(충남 예산군)과 효가동(충남 공주군)을 공격했음을 알 수 있다.

온수군을 공격한 것은 고려의 군량을 차단시킬 목적으로 경기만과 접해있는 공세면의 세곡창고 수군기지를 공격해 군량미를 탈취한 후 남쪽으로 내려오면 온수군 즉, 오늘날의 온양온천이며 그곳에서 차현(車峴)으로 나아갔다는 내용과 일치한다. 설사, 몽골군이 차령(車嶺)고개를 넘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온수군을 공격할 당시가 아니며 그로부터 3개월 후인 12월에 대흥군과 공주군을 공격할 때 별개의 공격루트가 분명한데도 몽골군이 공세면의 세곡창고가 아닌 온수군의 목욕탕지대를 공격하고 남쪽으로 내려와서 공주를 거처 차현 고개로 나아갔다는 논거(論據)로 인용하는 ‘고려사절요 권16 고종23년 8월 기사’는 분명 잘못 해석된 주장이다.

오늘날은 공세면에서 예산으로 내려가는 길이 있지만 당시엔 바닷물이 하천을 따라 내륙까지 넘나들어 이 시대의 도로망과는 전혀 다르게 길이 나있었다. 조선시대 후기 이전의 서부지역에 도로는 육지에서 바다 뱃길이 닿는 곳까지 소달구지가 운행할 수 있는 정도의 길이 있었을 뿐, 내륙으로 통하는 소달구지 길은 없었던 것이다. 몽골군들의 공격루트도 어디까지나 우마차가 통행할 수 있는 정도의 길을 따라 이동하지...산간 오지의 논둑 밭둑을 가로 질러 타국의 오두막집을 기웃거리고 다니는 그런 공격이 아니었다.

몽골군이 온수군_대흥군-공주군의 차령(車嶺)고개를 넘어 경기도 위치한 차현(車峴)기지로 되돌아갔다는 주장은 터무니없는 것이며, 마치 車峴(차현)이 車嶺(차령)인 것처럼 독자들을 혼란스레 유도하고 있지만 이는 터무니없는 주장인 것이다. 몽골군들이 유람하는 관광객도 아닌데 당시엔 길도 없는 차령산맥의 험로를 몇 날이나 더 걸어서 공주를 거쳐야하는 먼~곳으로 돌아갔다는 주장은 전혀 맞지 않는 설명이다, 공세면의 세곡창고에서 곡식을 탈취해 남쪽인 온양온천으로 나와 천안을 거쳐 경기도 차현(車峴)기지로 곧장 되돌아갔다는 설명이다.

사실이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왜 그런 엉터리 해석이 나오느냐하면 이미 고려사 기록들은 대몽 전쟁을 통해 불타 없어졌고 거의가 조선시대에 복원된 자료인데다가 공세면의 세곡창고 기지가 있던 곳을 답사해봐 도 고려 때의 비문은 남아있지 않고 대부분은 조선시대의 기록들만 비문에 새겨져 있으므로 고려 때엔 세곡기지를 운영했다는 사실조차도 알기 어렵다. 더욱이 우리의 역사학이라는 것은 일본식민사관의 가르침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특히 일본학자‘이마이시니’의 학설을 따르고 있는 우리의 역사 학풍은 실증이 없는 것은 역사로 인정할 수 없다는 학설이다.

언 듯 들으면 그럴 듯하게 인식되지만 기실은 인류 역사의 자취에서 우리에게 뒤질 수밖에 없는 일본은 한민족의 월등히 긴 역사를 부정하고자하는 흉계에 의해 조선의 역사학도들에게 실증이 없는 설화는 지워버리라고 가르치면서도 일본의 ‘오꾸니누시’ 신화는 실존 역사라고 우기며 우리민족보다 더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천손민족이라는 억지로 소위 天皇(천황)론을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역사학자들은 일본의 조선 상고사 말살음모 논리를 마치 새로운 학문인 것처럼 신봉하면서 분명한 기록이 없는 것은 무시하거나 부정하는 방법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으며 그 사례 중에 하나가 고려시대에는 더욱 세곡 운반기지가 필요했을 오늘날 충남 아산군의 공세면 세곡창고를 아예 없었던 것처럼 무시해버리고 몽골군들의 공격을 오늘날의 온양온천 목욕탕 때려 부수러 온 침공으로 역사를 잘못 해석한 것이다.

그 때문에 몽골군이 오늘날의 온양온천 목욕탕을 파괴하고 남쪽으로 내려와 충남 예산-공주를 거처 차령고개를 넘어 천안을 지나 그들의 중간 군사 기지가 있는 진짜 차현(車峴)고개의 ‘망이산성’으로 되돌아갔다는 엉터리 주장으로 차령과 공주를 연결해 왕건의 훈요 8조에서 말하는 배역지세의 기준 경계점을 정해 호남을 비하하고 있으며, 이는 호남을 모략하고 싶은 특정 집단이 있었다면 그들에게 동조하는 阿諂(아첨)이 多分(다분)한 역사 왜곡 해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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