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 시사평론가- 의병의날 특별기고] 결코 잊어서는 안될 10월의 역사 ‘남한의병 대학살사건’
“돌진하여 싸우다가 죽었고, 약한 자들은 도망하다가 칼을 맞았다”
[광주타임즈]=오늘, 10월 25일은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될 ‘희생의 역사’가 남아있는 날이다. 그러나 이를 아는 이는 많지 않다. 115년 전인 1909년 9월 1일부터 45일간 왜군(倭軍)은 남의 나라 땅인 호남지방에서 대대적인 의병 토벌작전을 폈다. 이 만행으로 103명의 의병장과 4138명의 의병들이 체포 또는 자수하였고, 최소 500명 이상이 피살됐다. 관련 없는 민간인들도 왜군의 방화·약탈·살인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이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 이어 외적(外敵)이 한반도에서 저지른 세 번째로 큰 사건이었다. 일본은 이 작전 10개월 뒤 대한제국을 먹어 삼켰다.
두 차례 한국침략, 일본에 정신 줄 놓아선 안돼
오늘날 일본은 헌법개정으로 군사대국을 노리고 있고, ‘북중러’에 맞서는 ‘한미일’ 군사동맹을 성사시키려고 은근히 미국의 옆구리를 찌르고 있다. 일본은 500년 전에는 임진왜란을, 114년 전에는 한국을 병탄했고, 한국인을 태평양 전쟁에 끌어들여 수백만 명을 희생시켰다. 이런 일본에 대해 이제 평화시대가 왔다는 것만 믿고, 허리띠 풀고 술잔이나 나누며 정신 줄을 놓아서야 되겠는가? 우리는 여전히 역사의 교훈을 잊어서는 안된다.
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 정부가 군대를 해산하자 분노한 서울과 지방의 군인 상당수가 무기를 들고 의병에 참여했다. 이를 ‘정미의병’이라고 부른다. 의병전쟁은 1907~1908년에 가장 거셌다. 8도 의병이 힘을 합쳐 서울탈환 전략도 세웠다. 왜군의 견제가 강화됐다. 강원도와 충청도에서 왜군의 잔인한 탄압작전은 영국 F. A. 맥켄지 종군기자의 취재로 잘 알려져 있다.
1909년 들어서면서 전국 의병 전투횟수의 47.3%(1738건), 의병수의 60.1%(1만3155명)가 전라남·북도에 집중되었다.(김정명, ‘호남지방의 의병전쟁과 남한 대토벌작전’에서 발췌) 호남은 곡창지대이므로 일본으로서는 식량확보 차원에서도 중요한 거점이었다. 하여 왜군 조선주차(駐箚)사령부는 ‘남한대토벌작전’이라는 이름이 붙은 의병 토벌계획을 세우게 됐다.
왜군의 또 다른 목적은 임진왜란에 대한 복수였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은 바다에서는 이순신 장군이, 육지에서는 의병이 지키고 있어 전남에 접근하지 못했다. 따라서 이 기회에 자기들의 위력을 보여줌으로써 역사상의 명예를 회복하자는 것이었다. 우리도 4∼5개의 의병부대가 연합하여 1907년 10월 30일 전남 장성에서 국권회복을 위한 ‘호남창의회맹소’(맹주 기삼연, 선봉장 김태원)를 결성하였다. 우리 의병부대는 임진왜란 때 왜군을 무찌른 경험이 있어 그들에 대해 전혀 위축되지 않았으나 사냥용 화승총과 약간의 신식 무기로는 기관총 등 신무기로 무장한 왜군을 상대하기 벅찼다. 따라서 게릴라식 작전이 주를 이루었다.
왜군, 조선인 밀정·정찰대 앞세워 정보수집
왜군은 토벌작전에 앞서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불량한 조선인 4,065명을 헌병보조원으로 채용해 투입함으로써 이이제이(以夷制夷)작전을 폈다. 1908년 5월 1일부터 개정된 신문지법에 따라 조선주차군의 동향을 보도하지 못하도록 했다. (신주백. ‘호남의병에 대한 일본 군·헌병·경찰의 탄압작전’에서 발췌) 또 보부상(褓負商)을 동원하여 의병을 진압하는 방법까지 모색하였으나 보부상들의 반대로 수포로 돌아갔다.
결국 9월 1일 대규모 군사작전에 들어갔다. 왜군은 정예부대 2개 연대, 2200여 명을 일본에서 불러와 제1연대는 순창-담양-나주-목포를 연결하는 전라남도의 서북지역에서, 제2연대는 그 연결선상의 동남지역에서 살육을 시작했다. 제2연대는 1일 전진 속도를 4km로 느슨하게 설정하고 ‘교반적(攪拌的) 방법’이라는 초토화작전을 폈다. 교반적 방법이란 토벌군이 거쳐간 마을을 최소 2회 이상 십수 차례씩 되돌아가서 수색하는 방법이다. 20~60세 남자들을 대상으로 면장이나 이장 입회 아래 민적(民籍)과 대조하는 바람에 의병들이 빠져나갈 수 없었다. 체포된 의병을 밀정(密偵)으로도 이용했는데 그 숫자가 800여 명에 이르렀다. 또 의병장의 소재지나 의병부대의 근거지를 찾아내기 위하여 변장대(變裝隊)를 운영하기도 했다. 이들의 은밀한 활동은 보도되지 않아 의병들의 피해는 더 클 수밖에 없었다.
왜군은 밀정들이 수집한 정보를 가지고 의병장이나 의병의 가옥은 물론 마을 전체 가옥을 불태우고, 민간인 총살도 서슴치 않았다. 또 수도 중인 비구니를 윤간하는 반인륜적 행위를 저지르고 문화재를 약탈하는가 하면 의병의 근거지라며 지리산에 있던 연곡사와 문수암을 불태우기도 했다. 왜군들은 부상병이나 체포된 의병들을 법적 절차를 거치지 않고 잔인하게 학살했는데 호남창의회맹소 맹주 기삼연의 총살형이 대표적인 예이다. (홍영기, ‘대한제국 호남의병연구’에서 발췌)
의병, 한때 연안·도서지역도 장악
호남의병은 서남해 연안과 도서지역도 한때 장악하였다. 일본 어선의 어자원 남획을 제지하고 일본 화물선의 통행을 막기도 했다. 1908년 말에 완도에서 의병이 봉기하자, 일본인뿐만 아니라 주재순사까지 목포로 퇴각하였다. 그러자 왜군은 목포와 여수에 대포 등으로 무장한 경비선 10척을 배치하여 도서지역에서 활동하던 의병들을 진압했다.
“더 이상 달아날 곳 없어 죽은 자 수천 명”
매천 황현(梅泉 黃玹)은 왜군의 ‘작전’을 직접 목격하고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왜인(倭人)들은 길을 나누어 호남의병을 수색하였다. 위로는 진산 김산 김제 만경, 동으로는 진주 하동, 남으로는 목포에 이르기까지 사방을 그물을 펼치듯이 포위하였다. (그들은) 촌락마다 샅샅이 수색하기를 마치 참빗으로 빗질을 하듯 집집마다 뒤지다가 조금이라도 혐의가 있으면 즉시 죽였다. … 의병들은 목숨을 부지하려고 삼삼오오 사방으로 흩어졌으나 몸을 감출 수 없었다. 강한 자들은 돌진하여 싸우다가 죽었고, 약한 자들은 기어이 도망하다가 칼을 맞았다. 점차 쫓기어 강진, 해남 땅에 이르렀으나 더 이상 달아날 곳이 없어 죽은 자가 수천 명이나 되었다’ (매천야록)
얼마나 참혹했던지 전라북도에 파견된 선유위원 윤도순은 일제 군경이 민가를 소각하고 의병혐의자를 즉결처분하는 등 불법적인 행위를 저지른 경우가 많아 주민들이 불안해한다고 내각에 보고할 정도였다.
45일간의 한·일전쟁은 10월 25일 끝났다. 우리의 피해는 엄청났다. 의병장 임창모 안찬재는 전사하고, 심남일 안규홍 전해산 강무경 권택 김공삼 박포대 양윤숙 임순호 양진여 양상기 나성화 박사화 이강산 오성술 모천년 김영준 김병철 조규문 강사문 유병기 김영백 정일국 등은 체포되어 모두 순국했다. 포위망을 탈출한 인물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이로서 국내에서 대규모 의병활동은 마무리되고 국외의 독립운동으로 옮겨갔다.
국가 약해지면 배신자와 밀정이 날뛴다.
남한대토벌작전이 우리에게 남겨준 교훈은 무엇일까.
첫째, 침략은 미소와 사탕을 가지고 스멀스멀 찾아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일본은 1855년 ‘정한론(征韓論)’을 거론한 이후 대한제국의 독립을 보호하겠다는 입발림으로 한국의 정치 수뇌부들을 마취시켰다. 신문물을 들여온다는 핑계로 자원을 수탈해갔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외국의 미소와 사탕을 경계해야 한다. 설령 일본이 ‘국화(菊花)’를 내밀더라도 등 뒤에 감춰둔 ‘칼’을 경계하며 여기에 대비하는 결기(決起)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둘째, 국가의 힘이 약해지면 배신자와 밀정들이 날뛴다. 을사조약 이후 정부의 각료를 비롯해 존경받던 지식인들까지 일본의 정책에 찬성해 국민을 현혹시켰다. 친일 민간단체인 일진회는 시가행진까지 해가며 ‘한일병합’을 주창했다. 또 앞서 학살작전에서 보았듯이 한국인이 주축이 된 밀정, 헌병보조원, 변장대들이 은밀히 의병들을 찾아내는 배신행위를 서슴치 않았다.
셋째, 국제관계를 제대로 살피지 못하면 강대국의 ‘노리개’가 된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일본 정부는 1904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자 1905년 들어 가쓰라·태프트 밀약(7월 29일), 제2차 영일동맹(8월 12일), 포츠머스 조약(9월 5일)을 맺어 열강으로부터 한국의 지배권을 인정받은 뒤 반강제로 을사조약(11월 18일)을 체결했다, 대한제국 정부는 이러한 움직임을 소상히 파악하지 못했다. 한반도에서 많은 청년을 희생시킨 미국은 우리의 혈맹국이 분명하지만 한편으로는 미국의 이익이 침해될 경우 가만있지 않았다. 하물며 전과가 있는 일본이 한국에 대해 근린친선을 맺으려 하는 것을 완전히 믿어서야 되겠는가.
‘의병학살’ 명칭 바꾸고 ‘비극’ 조형물 설치를...
넷째, 비록 패하긴 했지만 ‘비극의 역사’도 ‘역사’이다. 하여 ‘남한의병대학살사건’으로 명칭을 바꾸고, 민간에서나마 왜군의 작전이 종결된 장소에 기념조형물을 세워 기억해야 한다. 기울어져 가는 국권을 지키다 산화한 의병장과 의병들에 대해서도 충분한 보훈혜택을 주어야 한다. 그래야 앞으로 위기발생시 국민들이 적극 나서서 ‘의병의 맥’을 잇게 될 것이다.
10월 25일, 우리 의병들은 어쩔 수 없이 무기를 내려놓아야 했지만 하루 뒤인 26일, 안중근 의사는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처단했다. 그로부터 20년 뒤인 1929년 11월 3일에는 청소년들의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났다. 우리의 선인(先人)들이 왜 자신을 희생해가며 이렇게 끈질기게 일제에 맞서왔는가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