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읽어야 하는 이유
[광주타임즈]신안교육지원청 교육장 김재흥=튼튼한 것 속에서 틈은 태어난다/ 서로 힘차게 껴안고 굳은 철근과 시멘트 속에도/ 숨쉬고 돌아다닐 길은 있었던 것이다/ 길고 가는 한 줄 선속에 빛을 우겨넣고 버팅겨 허리를 펴는 틈/ 미세하게 벌어진 그 선의 폭을 수십 년의 시간, 분, 초로 나누어본다/ 아아, 얼마나 느리게 그 틈은 벌어져온 것인가/ 그 느리고 질긴 힘은 핏줄처럼 건물의 속속들이 뻗어 있다/ –중간 생략 - 어떤 철벽이라도 비집고 들어가 사는 이 틈의 정체는 사실은 한줄기 가냘픈 허공이다/ 하릴없이 구름이나 풀잎의 등을 밀어주던 나약한 힘이다.(이하 생략) - 김기택, ‘틈’ -
참으로 위대한 관찰이다. 눈을 돌려 사물에 집중해보자. 시(詩)가 될 수 없는 것들이 김기택의 눈에 밟히면 시(詩)가 되고 의미가 탄생한다.
사소한 작은 것에 집중하고 몰두하는 일에 우리는 무관심했고 도외시했다. 치밀하고 정교한 작업 중의 하나가 시(詩)를 쓰는 일이란 것을 시인은 어처구니없는 아주 작은 틈에서 초정밀의 끈적한 ‘틈’이라는 것을 이끌어 낸다.
관찰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그 사물 안에서 자라고 있는 관념의 뜰은 얼마나 넓은 광활한 평야이고 하늘인지 시인은 웅변하고 있다.
콩나물을 다듬는답시고 아무래도 나는 뿌리를 자르진 못하겠다/ 무슨 알량한 휴머니즘이냐고 누가 핀잔한대도 콩나물도 근본은 있어야지 않느냐/ 그 위를 향한 발돋움의 흔적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하지는 못하겠다/ 아무래도 나는 콩나물 대가리를 자르진 못하겠다/ 죄 없는 콩알들을 어둠 속에 가두고 물 먹인 죄도 죄려니와/ 너와 나 감당 못할 결핍과 슬픔과 욕망으로 부풀은 대가리 쥐 뜯으며 캄캄하게 울어본 날들이 있잖느냐/ 무슨 넝마 같은 낭만이냐 하겠지만 넝마에게도 예의는 차리겠다/ 그래, 나는 콩나물에게 해탈을 돕는 마음으로 겨우 콩나물의 모자나 벗겨주는 것이다/ - 복효근, ‘콩나물에 대한 예의’ -
우리가 무심코 벗겨 내고 잘랐던 콩나물에 이런 관념의 헤엄을 칠 수 있는 시인은 어쩌면 어머니의 태내에서부터 강력한 상상력의 혜안(慧眼)을 부여받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쩌랴? 시(詩)가 고독한 독백이거나, 아니면 삶의 질 회복이라는 논리의 시각에서 기초한 인성(人性)의 시발점이라는 사실을 시인은 일찍이 통달했으니, 그 영특한 자연주의적 상상력과 추리력에서 뽑아낸 생(生)의 물결은 비단같은 노래가 되어 삶을 촉촉하게 목 축이고 있으니.
아득한 고층 아파트 위/ 태양이 가슴을 쥐어뜯으며/ 낮달 옆에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 치욕에 관한한 세상은 멸망한 지 오래다/ 가끔 슬픔 없이 십오 초 정도가 지난다/ 가능한 모든 변명들을 대면서 길들이 사방에서 휘고 있다/ 그림자 거뭇한 길가에 쌓이는 침묵/ 거기서 초 단위로 조용히 늙고 싶다/ 늙어가는 모든 존재는 비가 샌다/ 비가 새는 모든 늙은 존재들이/ 새 지붕을 얹듯 사랑을 꿈꾼다/ - 중간 생략 - 현기증이 만발하는 머릿속 꿈 동산/ 이제 막 슬픔 없이 십오 초 정도가 지났다/ - 심보선, ‘슬픔이 없는 십오 초’ -
낮달이 주인이 되어버린 시대에 가슴을 쥐어뜯는 태양은 상실을 넘어 치욕의 시대를 살아야 한다는 시인의 애절한 토로 앞에서 십오 초의 시간은 차라리 존재의 단절을 은유한다.
병들고 혼탁한 시대의 낡은 은유가 우리 삶의 촉수에 혼불을 켜는 듯한 자극이 둔각으로 벌어진 칼날이다. 사유의 고뇌없이 저항할 수 있는 삶의 면역력은 결코 단단하지 않다.
때로는 슬픔이 자랄 수 있는 공간마저 우리의 주무대일 수 있으니 십오 초의 단절은 슬픔이 병든 시대에 단비처럼 맛있는 꿀맛의 시간일 것이다.
산행 중에 자벌레 한 마리 바지에 붙었다/ 한 치의 어긋남도 용납하지 않는 연초록 자/ 자꾸 내 키를 재보며 올라오는데/ 가끔씩 고갤 좌우로 흔든다./ 그는 지금 내 세월의 깊이를 재고 있거나/ 다 드러난 오장육부를 재고 있을지도 모른다./ 혹은 끈질기게 자라나는 사랑이나 욕망의 끝자락까지/ 또 고갤 몇 번 흔들더니 황급히 돌아 내려간다./ 나는 아직 잴 만한 물건이 못 된다는 듯이/ 잰 치수마저 말끔히 지워가며. –이상인(광양중마초 교장), ‘자벌레’-
얼마나 아름다운 관념의 비상(飛上)인가? 한 치도 안 되는 작은 미물(微物) 앞에서 한없이 졸아드는 인간의 넋이여! 작은 벌레마저도 올라갈 때와 내려갈 때를 안다는 것, 그리고 그 대상은 다름 아닌 인간을 표적으로 삼아 정(正)과 사(邪)의 구분선인 척도를 만들고, 혹은 가치의 높고 낮음을 매겨버리는 것, 침묵으로 일관하는 미물로부터 불가능한 가르침을 압축하여 녹여낸 시인의 지적 안테나는 늘 강렬한 태양이다.
세상일이란 한사코 결을 타야 한다며/ 묵은지를 쭉쭉 찢어 사기접시에 놓으셨다/ 그래야 나른한 봄날에 새순이 돋고/ 감칠맛도 곱절이 된다고 하시며/ 등걸 같은 손으로 찢어야 결 또한 고와진다며/ 나를 말리셨던 며칠 전까지/ 묵은지 가닥 꽃잎처럼 내 숟갈에 걸쳐주셨다/ 아내가 차려놓은 밥상 묵은지를 찢어보았다/ 어머니의 억센 힘줄이 드러났다/ 한 세월 거칠게 가로지른 질긴 생의 흔적이/ 묵은지에서 곱게 발효되고 있었다/ - 정영희(한려초 교장), ‘묵은지를 찢으며’ -
수많은 시간동안 효경 교육은 인성 교육의 화두였고 앞으로도 효경 사상은 그냥 던져 버릴 수 있는 시대의 유행이 아니다. 현재와 미래를 아우르는 민족의 혈액이며 교육의 근간이다.
이런 시(詩)를 두고서 학생들에게 굳이 ‘효도하라, 효도하라’ 가르칠 필요가 있겠는가? 시(詩) 한 줄이 학생들에게 감동 감화의 울림을 일으킬 수 있다면, 같은 김치라도 어머니가 쭉쭉 찢어주시는 억센 힘줄의 결에서 부모에 대한 사랑을 느낄 수 있으면, 시인은 축배의 잔을 들어도 무방할 것이다.
시(詩)가 가지고 있는 이런 것들 때문에 교사가 시(詩)를 읽고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할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