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의 위대한 이정표를 한강이 썼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든 이후 세계에 한글의 우수성을 알릴 수 있는 대서사시를 지구촌에 알린 셈이다.
이런 격한 감동을 누군가 이렇게 말했다. “이젠 우리도 노벨문학상을 원본으로 읽을 수 있게 됐다”고.
이제 타인의 작업 흔적이 깃든 번역본이 아닌 순수 원본을 곁에 두고 노벨문학상 작품을 읽을 시간을 가져보면 어떨까? 소설이 길다면 우선 시작품으로라도 그를 만나보자.
작가 한강은 1993년 연세대 국문과 졸업 후 잡지사 ‘샘터’ 편집부에서 기자로 일하며 습작하다가 그해 계간 ‘문학과 사회’ 겨울호에 시 ‘서울의 겨울’ 등을 실으며 시인으로 등단했다. 이듬해인 1994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 ‘붉은 닻’이 당선되며 소설가로 데뷔한 후에는 소설 집필에 주력해왔다. 한강은 소설을 쓰면서도 비록 소량이기는 하지만 꾸준히 시를 발표하곤 했다.
스웨덴 한림원은 한강의 작품 세계를 통틀어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서고 인간의 삶의 연약함을 드러낸 강렬한 시적 산문”이라고 표현하며 선정 이유를 밝혔다.
서시
내가 네 운명이란다, 그동안
내가 마음에 들었니, 라고 묻는다면
나는 조용히 그를 끌어안고
오래 있을 거야.
눈물을 흘리게 될지, 마음이
한없이 고요해져 이제는
아무것도 더 필요하지 않다고 느끼게 될지는
잘 모르겠어.
당신, 가끔 당신을 느낀 적이 있었어,
라고 말하게 될까.
당신을 느끼지 못할 때에도
당신과 언제나 함께였다는 것을 알겠어,
라고.
아니, 말은 필요하지 않을 거야.
당신은 내가 말하지 않아도
모두 알고 있을 테니까.
내가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후회했는지
무엇을 돌이키려 헛되이 애쓰고
끝없이 집착했는지
매달리며
눈먼 걸인처럼 어루만지며
때로는
당신을 등지려고도 했는지
그러니까
당신이 어느 날 찾아와
마침내 얼굴을 보여줄 때
그 윤곽의 사이사이, 움푹 파인 눈두덩과 콧날의 능선을 따라
어리고
지워진 그늘과 빛을
오래 바라볼 거야.
떨리는 두 손을 얹을 거야. 거기,
당신의 뺨에,
얼룩진.
여름날은 간다
검은 옷의 친구를 일별하고 발인 전에 돌아오는 아침
차창 밖으로 늦 여름의 나무들 햇빛 속에 서 있었다.
나무들은 내가 지나간 것을 모를 것이다.
지금 내가 그 중 단 한그루의 생김새도 떠올릴 수 없는 것처럼
그 잎사귀 한 장 몸 뒤집는 것 보지 못한 것처럼 그랬지
우린 너무 짧게 만났지.
우우우 몸을 떨어 울었다 해도 틈이 없었지
새어들 숨구멍 없었지 소리죽여 두 손 내밀었다해도
그 손 향해 문득 놀라 돌아봤다해도.
어느 날 운명이 찾아와 / 나에게 말을 붙이고
서울의 겨울
어느 날 어느 날이 와서
그 어느 날에 네가 온다면
내 가슴 온통 물빛이겠네.
네 사랑
내 가슴에 잠겨
차마 숨 못 쉬겠네
내가 네 호흡이 돼주지,
네 먹장 입술에
벅찬 숨결이 돼주지,
네가 온다면 사랑아,
올 수만 있다면
살 얼음 흐른 내 빰에 너 좋아하던
강물 소리,
들려주겠네